
지도에도 잘 안 보이는 그 좁은 물길 하나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 사이, 페르시아만이 인도양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목. 가장 좁은 곳은 폭이 겨우 39km. 서울에서 수원까지 거리보다 조금 더 먼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39km가 막히면, 지구 반대편 한국의 주유소 가격판 숫자가 바뀝니다.
전 세계 석유의 20~30%가 이 좁은 물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합니다. 사우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UAE — 산유국들의 기름이 전부 여기를 거쳐야 바다로 나갑니다. 2026년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뒤, 이란은 이 해협을 봉쇄했습니다. 반년 가까이 이어지는 대치 속에 최근엔 미군이 봉쇄를 뚫으려던 화물선을 실제로 타격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통행량은 평시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요.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왜 세계 경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겨우 39km짜리 물길 하나에 목줄을 잡혀야 하는 걸까요?
크고 안전해 보이는 것들의 비밀
우리는 보통 “크다”와 “안전하다”를 같은 말로 씁니다. 세계 경제는 크니까, 국제 무역망은 촘촘하니까, 어딘가 하나가 흔들려도 전체는 끄떡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크고 복잡한 시스템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작은 지점 하나에 전체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몸 전체를 움직이는 신경이 손가락 끝이 아니라 목의 아주 가는 척수 한 줄에 몰려 있는 것처럼요. 척수 자체는 손가락 하나보다 작지만, 거기가 다치면 몸 전체가 멈춥니다.
호르무즈 해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무역량 전체에 비하면 이 39km는 먼지만큼 작은 면적이지만, 거기가 막히는 순간 지구 반대편의 물류, 물가, 심지어 정치까지 흔들립니다. 크다고 해서 튼튼한 게 아니라, 어디에 목이 걸려 있느냐가 진짜 강함을 결정합니다.
이건 세계 경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도 비슷합니다. 겉보기엔 안정적인 하루하루도, 사실은 몇 개의 아주 좁은 목 — 건강, 하나의 인간관계, 하나의 수입원 — 에 기대어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것일수록, 오히려 “이게 흔들리면 다 흔들리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물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축복인가, 약점인가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이란이 굳이 ‘해협 봉쇄’라는 카드를 꺼낸 이유입니다. 군사력으로 정면 대응하는 대신, 전 세계가 이란의 바다를 지나가야만 굴러가는 그 ‘연결’ 자체를 무기로 쓴 겁니다. “네가 나를 공격했으니, 나는 세계 전체의 숨통을 쥐겠다.”
우리는 보통 연결을 좋은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무역이 연결되면 다 같이 잘살고, 사람이 연결되면 외롭지 않다고요. 그런데 연결되어 있다는 건 동시에, 그 연결점을 쥔 누군가에게 나를 흔들 힘을 쥐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서로 의존함으로써 풍요로워졌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인질이 되는 법도 함께 배운 셈입니다.
이건 국제정치만의 얘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된다는 건 그만큼 더 행복해질 가능성과 함께, 그만큼 더 흔들릴 수 있는 지점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니까요.
주유소 앞에서 문득 깨닫는 것
가장 이상한 지점은 이겁니다. 나는 뉴스 속 그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이란도, 미국도, 호르무즈 해협도 내 일상과는 먼 이야기 같죠. 그런데 어느 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숫자가 훌쩍 오른 걸 보는 순간, 그 먼 전쟁이 실은 내 지갑을 통해 나에게 이미 도착해 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는 “나는 세상과 무관하게 산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눈에 안 보이는 아주 가는 실 몇 가닥으로 지구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실이 팽팽해지는 순간에만, 우리는 그 실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어쩌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 같습니다. 실이 끊어지기 전에, 굳이 미리 그 실의 존재를 알아차려 보는 것. 내 삶이 딛고 선 좁은 목이 어디인지, 평온할 때 미리 한 번쯤 물어보는 것.
당신의 삶에도, 39km 같은 지점이 있나요?
이 글은 2026년 8월 기준 호르무즈 해협 정세를 소재로 쓴 사색 에세이입니다.